You are currently viewing 최고의 도시 아덴을 본 바울의 반응

최고의 도시 아덴을 본 바울의 반응

밀톤 한인 장로 교회 주일 설교 (2018년 12월 09일)

본문: 사도행전 17:16-23

제목: 최고의 도시 아덴을 본 바울의 반응

설교자: 정창송 목사

바울이 아덴에서 그들을 기다리다가 그 성에 우상이 가득한 것을 보고 마음에 격분하여 회당에서는 유대인과 경건한 사람들과 또 장터에서는 날마다 만나는 사람들과 변론하니아덴 사람들아 너희를 보니 범사에 종교심이 많도다(17:16-17,22)

사도행전 강해 65번째 시간입니다. 오늘 본문은 당시로서는 헬라 문화의 중심지로 최고의 학문과 지성으로 유명했던, 그러나 이에 못지 않게 엄청난 우상과 미신이 뿌리내린 아덴에서 전도 사역을 펼치는 바울의 모습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바울의 아덴에서의 전도를 통해 성경이 우리에게 주는 몇 가지 교훈을 살펴 보고자 합니다.

1. 바울의 전도에 대한 열정: 아덴은 우리가 알다시피 당시로서는 최고의 철학과 학문을 자랑하는 헬라 문화의 중심지였습니다. 그런데 아이러니칼 한 것은 이런 최고의 지성의 도시라고 불리워진 이 아덴이 이에 못지 않게 엄청난 우상과 미신이 뿌리 내린 도시였다는 것입니다.(16절) 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그 때 아덴에는 크고 작은 우상들이 무려 3만 개나 있었다고 합니다. 얼마나 많았는지 그들이 섬기는 우상 중에는 심지어 자신들 조차 “알지 못하는 신”도 있었다고 합니다.(23절)

 이것을 본 사도 바울의 반응은 두 가지였습니다. 하나는 분노였습니다. “바울이 아덴에서 그들을 기다리다가 그 성에 우상이 가득한 것을 보고 마음에 격분하여”(16절) 여기서 “격분하여”라는 원어적 의미는 문자적으로 그대로 표현하면 “그의 영이 분통이 터지고 있었다”라는 의미입니다. 바울은 당시 최고의 학문의 도시, 철학과 지성의 도시의 아름다움을 느끼기는 커녕 굉장한 분노가 일어났습니다. 이것은 우상에 대한 죄와 사탄에 대한 분노였습니다.

 바울은 이 아덴에서 받았던 충격이 너무 커서 로마서1:22-23에서 이렇게 탄식합니다.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어리석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바울은 자기들은 똑똑하다 지혜롭다 말은 하지만 세상에 이렇게 미련한 사람들이 다 있나! 하며 망하기 일보 직전에 있는 아덴 사람들의 모습을 보며 속이 터진 것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도 아덴과 거의 똑같습니다. 1973년도에 우리나라에 정식으로 등록된 무당의 수가 3만 명이었는데 지금은 백만 명이 넘었다고 합니다. 이런 현실에서 여러분은 바울이 느끼는 이런 분노를 느끼고 있습니까?

 여러분! 이 거룩한 분노가 있어야 이 땅이 살고 우리 자녀가 삽니다. 왜 사도 바울이 분노했습니까? 바울에게는 하나님을 믿어야만 구원을 얻고 믿지 않으면 구원을 얻을 수 없다는 분명한 확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롬1:16-17) 이 구원에 대한 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어떻게 해서든지 이 아덴 사람들을 살리려고 분통이 터진 것입니다. 우리가 이 복음에 대한 구원에 대한 확신이 부족하기 때문에 우리 사랑하는 가족 중에도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들이 있는데도 안타까워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 것이 생명에 관계된 것이라는 확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2. 실패한 논쟁: 바울이 아덴의 우상들을 보면서 보인 두 번째 반응은 복음을 전하는 것이었습니다. (17-18절) 그런데 성경 학자들은 많은 분들이 바울의 이 아덴의 전도를 실패라고 해석을 합니다. 이유는 아덴에서의 전도 후에 이곳에 교회가 세워졌다는 기록이 안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아덴에서 예수를 믿은 사람이 몇 사람 안되었기 때문입니다.(34절) 그러면 아덴에서 왜 이렇게 결실이 없었을까? 하는 것입니다. 핍박이 심해서 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 곳에서는 사람들이 바울에게 너가 하고 싶은 말 있으면 다해보라고 기회를 주었습니다.(19-21절) 그러면 왜 바울이 전도의 열매를 풍성히 맺지 못했을까요?

 당시 아덴 사람들의 특징이 어떠한가 하면 21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모든 아덴 사람과 거기서 나그네 된 외국인들이 가장 새로운 것을 말하고 듣는 것 이외에는 달리 새로운 것을 쓰지 않음이더라” 이것을 보면 아덴 사람들은 논쟁을 좋아하는 사람들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진리 탐구 보다는 논쟁 자체를 즐기는 것에 익숙해져 있는 사람들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당시 아덴 사람들은 매우 철학적이었습니다. 특히 두 철학 학파가 그 도시를 지배하고 있었는데, 하나는 에피쿠로스 또 하나는 스토아 철학자들입니다. 이 두 부류의 철학자들은 바울의 변론에 특별한 관심을 가졌습니다.(18-19절)

 바울도 많이 배운 사람입니다. 그래서 상당히 많이 복음을 증거하는 과정에서 지적인 논쟁을 많이 했던 것 같습니다. 본문에 “변론”이란 단어와 “쟁론”이란 단어가 등장을 합니다. 사실 바울의 이 전도 방법이 틀렸다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복음 증거할 때 변론이나 설득성 있는 논쟁도 때로 필요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실제 전도 현장에서 이런 지적이나 사색적인 논쟁을 가지고 예수를 믿고 변화되는 경우가 많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복음을 증거할 때 가장 중요한 요소가 무엇입니까? 믿음에 촛점을 맞추어서 성경 말씀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왜요! 전도는 믿음을 세워주는 것이 핵심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후에 이 아덴에서의 사역을 돌아보면서 내가 전도를 한 것이 아니라 논쟁을 했다고 생각을 하며 많이 후회를 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바울 서신서에 보면 논쟁을 하지 말라는 이야기가 종종 나옵니다.(딤전2:23, 딤후2:23, 고전1:20-22, 고전2:1-3) 그러므로 우리가 교회 안에서 해야 될 일이 무엇입니까? 논쟁을 피해야 합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논쟁해서 믿음이 생기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목적은 믿음을 세워 주는 것에 있기 때문입니다. 전도의 미련한 것! 이것이 논쟁보다 훨씬 강하다 라는 것을 붙드시기 바랍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사도 바울은 아덴의 많은 우상들을 보고 분노했습니다. 복음에 대한 분명한 확신이 있어야 이런 거룩한 분노를 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 안에 이런 복음에 대한 확신과 열정이 있나 확인해 보시기 바랍니다. 전도는 논쟁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을 증거할 때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예수만이 살 길임을 아시고 예수만 전하는 믿음의 종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