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톤 한인 장로 교회 주일 설교 (2021년 3월 21일)
본문: 눅 19:28-44
제목: 종려 주일의 참된 의미
설교자: 정창송 목사
이미 감람 산 내리막길에 가까이 오시매 제자의 온 무리가 자기들이 본 바 모든 능한 일로 인하여 기뻐하며 큰 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하여 이르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눅19:37-38)
오늘은 종려 주일입니다. 종려 주일은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실 때 무리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예수님을 구약에서부터 예언되었던 메시야로 여겨 예수님이 이 땅의 왕으로 입성하신 날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오늘 우리는 종려 주일에 일어난 일들을 통하여 예수님의 이 예루살렘 입성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를 함께 살펴보고자 합니다.
1. 나귀를 타고 입성하신 이유: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것이 처음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사실 예수님은 거의 절기마다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어느 때에도 나귀를 타고 입성하신다거나 많은 사람들의 환영을 받으신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러 가시는 길에 다른 때와 분명히 다른 태도를 취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나귀를 타고 입성하셨고 많은 군중들의 뜨거운 환영을 받으셨습니다. 이것은 다른 때의 입성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선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면서 나귀 새끼를 타셨습니다(28-30절). 그런데 장성한 어른이 나귀 새끼를 타면 발이 땅에 닿게 되어 나귀를 타는 의미가 없게 됩니다. 병행구절인 마태복음에 보면 나귀와 나귀 새끼가 있는데 예수님은 일부러 나귀 새끼를 타셨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마21:7). 이것은 분명히 예수님이 무엇인가를 보여주려는 의도가 있으신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구약 성경 슥9:9절의 성취입니다.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이처럼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서 철저하게 말씀에 순종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당시에 누구든지 성경을 아는 사람이라면 나귀 새끼를 타고 이상한 모습으로 입성하시는 이 분이 메시야라는 사실을 알았을 것입니다. 정상적인 경우라면 30대의 건장한 청년이 나귀 새끼를 타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나귀 새끼를 타고 입성하시는 분은 정신병자가 아니면 메시야이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나귀 새끼를 타고 입성하신 것은 유대인들에게는 큰 시험이었습니다. 즉 그들이 성경을 믿는다면 하나님의 메시야 앞에 나와 무릎을 꿇고 복종하라는 표시인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성경에서 약속한 메시야를 거부하면 심판을 받을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나귀 새끼를 타심으로 겸손한 왕이심을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만왕의 왕이시지만 로마의 개선 장군처럼 말을 타고 입성하지 않으셨습니다. 말은 무력과 전쟁을 상징합니다. 그러나 나귀는 평화와 겸손을 상징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나귀를 타고 오셨다 라는 것은 군림이 아니라 섬기러 오셨다 라는 것입니다. 높임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낮아지기 위해 오셨다 라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예수님은 평화의 왕, 겸손의 왕으로 이 땅에 오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바로 구약에 예언된 진정한 메시야 바로 그 분이시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이요 또 예수님의 구원의 역사는 섬김과 겸손으로 이루어짐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나라에서 이 겸손과 섬김은 매우 중요한 요소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신 것은 힘이 없거나 죄가 있어서가 아니라 철저하게 낮아지고 겸손해야지만 말씀에 순종할 수 있고 그럴 때 비로서 이 땅에 진정한 평화를 가져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도 예수님이 보여주신 이 섬김과 겸손으로 말씀에 순종함으로 진정한 평화를 이루어 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 예수님 믿고 섬길 때 우리의 인생을 바꿀 수 있습니다.
2. 예루살렘 성을 바라보시며 우신 주님: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후 예루살렘에 대해 매우 비통해 하셨습니다(41-44절). 예수님은 이처럼 예루살렘을 보시면서 우셨습니다. 여기서 “우시다”를 원어에서 보면 “큰 소리로 울부짖다, 통곡하다”로 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예수님이 분명히 모든 사람들이 알아볼 수 있도록 자신의 신분을 밝히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셨는데도, 예수님을 환영하며 그 발 앞에 무릎을 꿇은 자는 너무나 적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분명히 하나님의 아들이 오신 것을 알면서도 예수님을 배척하여 십자가에 못 박는 무리가 바로 이 예루살렘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41-44절).
왜 이런 일이 일어났습니까? 하나님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우시면서 그들에게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다면 좋을 뻔했다”(42절) 고 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이 입성이 예루살렘 사람들에게는 마지막 회개의 기회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눈에는 이 모든 것이 숨겨졌습니다. 왜냐하면 욕심이 그들의 눈을 가렸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거부한 예루살렘은 이전에 바벨론에 의해 망한 것처럼 망하게 됩니다. 원수들이 토성을 쌓고 사면을 둘러 가두고 자식들을 땅에 메어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돌 하나도 돌 위에 그대로 남지 않고 철저하게 파괴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43-44절). 예수님의 이 예언은 주후 70년 로마의 디도 장군에 의해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바로 이것이 평화의 왕을 거부한 죄의 대가입니다.
문제가 무엇입니까? 당시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정확하게 몰랐다는 것입니다. 무리들은 예수님을 오해했습니다. 예수님이 무엇을 이루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는지 몰랐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자신들의 필요인 정치적, 경제적 필요를 채워주는 메시야로 알았던 것입니다. 그 기대가 무너지자 이 무리들이 돌변하여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으라 함성을 질러댑니다. 여러분! 혹시 종려 주일을 맞이하면서 우리의 삶에 들어오신 예수님을 오해하고 있지는 않으십니까? 여러분에게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여러분은 어떤 때 예수님을 향하여 “찬송하리로다” 라고 고백을 하십니까? 종려 주일을 맞이하여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환영하고 왕으로 모시되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바르게 알 수 있는 은혜가 임하시기를 바랍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종려 주일을 통해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참된 의미를 깨달아 그 주님을 바로 만나고 섬김으로 우리의 삶의 모든 영역이 바뀌고 정말 “찬송하리로다” 주님을 찬양하는 신앙을 통해서 이 땅에 참된 평화가 주어지는 놀라운 축복의 통로로 쓰임 받으시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