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톤 한인 장로 교회 주일 설교 (2020년 08월 16일)
본문: 출애굽기 20:4-6
제목: 왜 우상을 섬기는가?
설교자: 정창송 목사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것의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며(출20:4)
십계명 강해 여섯 번째 시간입니다. 오늘 본문은 우상 숭배와 형상화의 철저한 금지를 기록하고 있는 십계명 중 제2계명입니다. 우리는 이 계명을 통해 성경에서 말하는 우상의 의미가 무엇이면 우상 숭배를 하는 이유에 대해 살펴보고자 합니다.
1. 우상을 섬기는 내면의 이유: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신 후에 그들과 언약을 세우시면서 어떠한 하나님의 형상도 곧 어떤 우상도 만들지 말 것을 명하셨습니다. 이것은 참으로 이해되지 않는 일입니다. 사실 자신의 형상을 만들어서 여러 곳에 세워 놓게 하시고 사람들로 늘 그 형상을 보게 한다면 더 강력하게 하나님을 섬기게 하실 수 있는데 하나님은 그것을 단호히 금하셨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저주와 축복의 말씀을 추가해서 이 계명의 준수를 강조하셨습니다(4-6절).
이것만 보아도 하나님께서 이 두 번째 계명을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하셨는가 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우상을 만드는 동기가 무엇입니까? 4절을 보시면 “너를 위하여 우상을 만들지 말고…” 그러니까 우상을 만드는 것은 철저히 자기 중심적인, 자신의 필요를 채워줄 신을 찾는 것입니다. 자신의 욕망을 채워주고 성취하는데 도움이 되는 신을 찾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기억하십시요. 자신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서 하나님을 찾는 사람은 언젠가는 하나님을 떠나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필요가 채워지는 순간 하나님이 필요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또 필요가 채워지지 않으면 그런 하나님을 찾을 이유가 없기 때문에 하나님을 떠날 가능성이 많은 것입니다.
우상을 섬기는 사람들은 그 열심이 대단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능력을 이용해서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으려고 하기 때문에 지극 정성입니다. 그래서 그들의 중심에는 늘 “지성이면 감천이다”라는 의식이 있어서 정말 열심이 특심입니다. 마치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벤딩 머신과 같습니다. 그래서 내가 하나님 열심히 섬길테니까 내가 원하는 것 누르면 주십시요 하는 그런 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깁니다. 여러분! 기복신앙이 왜 무서운 것입니까? 자신은 하나도 안 변하고 복만을 구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진정한 복은 속사람이 바뀌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상을 만드는 것을 철저히 금하신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요. 하나님은 우리의 필요를 능히 채워주실 수 있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필요를 채워 주시기 위해 존재하시는 분은 아니십니다. 우리가 연약한 인간이라 우리의 필요를 가지고 처음에는 나오지만 그러나 그 필요는 하나님을 만나기 위한 조건이지 목적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소원을 해결하기 위해서 하나님을 찾는다면 우상 숭배의 미혹에 걸려들게 되어 있습니다 우상을 섬기는 내면의 동기는 바로 이것입니다. 내 소원을 잘 들어줄 신! 내 자신의 필요와 욕망을 성취하는데 도움이 되는 신을 찾습니다. 오늘 이 시간 우리는 하나님을 위해 내가 존재하는가? 나를 위해 하나님이 존재하는가? 이 질문의 답에 따라서 우리 인생의 길이 완전히 다른 길로 가게 되며 또한 우리의 예배를 포함한 모든 신앙 생활이 전혀 달라질 수 있음을 깊이 깨닫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2. 형상을 만들지 못하게 하신 이유: 본문 4-5절을 보시면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것의 아무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사실 통치자들이 백성들을 다스리는 데 있어서 눈에 보이는 것을 이용하는 것만큼 효과적인 방법이 없습니다. 느부갓네살 왕이 자기 신상을 만들어 놓고 절하도록 하니까 얼마나 효과가 있었습니까? 지금도 많은 독재자들이 자신의 형상을 나라 곳곳에 세우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원래 “우상”이라는 히브리 원어 “페셀”은 눈에 보이지 않는 비실제적인 것을 형상화시켜 숭배의 대상으로 삼는 것이며 “형상”이라는 히브리 “테무나”는 자연물과 같은 형체를 지니는 것을 형상화시켜 경배 대상으로 만든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상이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것에 출발점을 둔다면 형상은 눈에 보이는 것이며 일종의 자연 숭배와 유사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히브리인들의 우주관인 하늘, 땅, 물 속 어떤 공간이든 눈에 보이는 어떤 것도 형상화 시키지 말라 말씀하십니다.
무슨 말입니까? 쉽게 말해서 눈에 보이는 것을 너무 의지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출32장에 보면 금송아지 사건이 나옵니다.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가서 지체하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론을 통해 금송아지 형상의 우상을 만들어 이 2계명을 범했습니다. 이에 하나님이 진노하셨습니다. 이게 죄의 특성입니다. 인간은 눈에 보이는 것을 간절히 원하는 죄의 속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인간은 눈에 보이는 하나님을 믿고 싶은 것입니다. 왜요! 눈에 보이는 것을 신뢰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형상화 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보는 것에 약합니다. 눈에 보이고 손에 잡혀야 안정감을 느끼고 안심을 합니다. 그래서 눈에 보이는 것에 끌려 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참된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형상화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형상화 되는 순간 하나님의 존재 자체가 왜곡되게 됩니다. 하나님이 형상화 되는 순간 하나님은 그 어떤 개념에 묶이게 되어 버립니다. 그래서 복음적인 기독교는 십자가 조차도 형상화 시키지 않습니다. 잊지 마십시요. 믿음은 들음에서 나는 것이지 본다고 믿는게 아닙니다(롬10:17) 우리 하나님은 눈에 보이지 않는 말씀으로 우리를 찾아 오십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우상숭배와 형상화는 자신의 만족을 얻고자 하는 죄성을 가진 우리의 본능과 정확하게 맞아 떨어집니다. 그래서 자신의 소원을 해결하기 위해 하나님을 찾으면 우상 숭배에 걸려 들게 되어 있습니다. 말씀의 사람이 되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섬기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