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톤 한인 장로 교회 주일 설교 (2018년 6월 17일)
본문: 사도행전 11장 1-18절
제목: 오해를 풀어준 베드로의 신앙
설교자: 정창송 목사
베드로가 예루살렘에 올라갔을 때에 할례자들이 비난하여 이르되 네가 무할례자의 집에 들어가 함께 먹었다 하니 베드로가 그들에게 이 일을 차례로 설명하여…내가 누구이기에 하나님을 능히 막겠느냐 하더라(행11:2-4,17)
사도행전 강해 42번째 시간입니다. 오늘 본문은 베드로가 이방인 고넬료의 집을 방문한 사건이 문제가 되어 베드로가 자신이 본 환상과 고넬료의 가정에 성령이 임하신 사건을 설명함으로, 이방인의 구원이 하나님의 뜻임을 밝히고 이에 예루살렘 교회가 이방인들의 선교를 인정하는 장면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베드로가 어떻게 오해를 풀어갔는지를 통해 문제 해결의 지혜를 배우고자 합니다.
1. 하나님의 권위 앞에 무릎을 꿇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베드로가 이방인인 고넬료 가정에 세례를 베풀었다는 소식은 이미 소문을 타고 퍼져 나갔습니다.(1절) 그만큼 당시로서는 획기적이고 충격적인 사건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이방인들이 복음을 듣고 성령을 받았다는 이야기가 모든 사람들에게 기쁨이 된 것은 아닙니다. 베드로가 돌아오자 할례자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이방인과 함께 했다는 사실을 들먹거리며 막 따지듯이 비난을 합니다.(2-3절)
그러니까 하나님이 주신 놀라운 부흥이 오히려 시험이 되고, 교회 분열의 원인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유대 할례자들의 오해로 인해 상한 감정으로 베드로를 비난할 때 베드로가 어떻게 반응합니까? 감정적인 성격의 베드로지만, 그는 자신의 권위를 내세우지 않고 사건의 전말을 자세히 설명해 줌으로써 유대인 성도들의 오해를 불식시켰습니다. 4절을 보십시요. “베드로가 그들에게 이 일을 차례로 설명하여” 지금 이 유대 할례자들이 틀린 이유가 무엇입니까? 저는 할례자들이 악의를 가졌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악의의 문제가 아니라 수준의 문제입니다.
유대 할례자들은 율법의 전통에 익숙해져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틀리고 싶어서 틀린 것이 아니라 그들의 수준 때문에 틀리는 것입니다. 원래 베드로도 영적으로 이 수준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베드로의 편견을 깨뜨리시고 수준을 높여 주셨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종종 경험하는 것인데 그릇이 작은 사람은 그릇이 큰 사람을 이해 못합니다. 잊지 마십시요. 우리가 무엇을 정확하게 판단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스스로의 수준을 높이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러므로 내 수준이 낮을 때는 판단을 유보하시고 잘 배우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가 어떤 사람을 판단하거나 조언을 하는 것은 내가 그 사람보다 더 크다는 확신이 들 때 하는 것이 좋습니다. 내가 그 사람보다 크지 않을 때 계속해서 얘기를 하면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특별히 하나님의 생각과 우리의 생각이 다를 때가 있습니다. 베드로가 어떻게 했습니까? 베드로는 겸손하게 그리고 자세하게 설명했습니다. 그리고 결론이 무엇입니까? “내가 누구이기에 하나님을 능히 막겠느냐” 그랬더니 그들이 다 받아들이는 것을 보게 됩니다.(18절) 예루살렘 교회 교인들은 오해가 있었지만 은혜를 받은 자들입니다. 그들은 베드로의 설명에 깊은 선민의식의 편견을 무너뜨리는 “들을 귀”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성령 받은 자의 모습입니다.
구약 시대에는 제사장들의 귀에 피를 뿌렸다고 합니다. 거룩해진 귀로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들으라는 의미입니다. 잘 들은 제사장만이 하나님을 잘 이해할 수 있고 그 이해를 바탕으로 백성의 아픔을 하나님에게 잘 전할 수 있기에 취한 상징적 메시지입니다.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도는 말하는 훈련이 아니라 듣는 훈련입니다. 주님이 기뻐하시는 헌신은 들음의 헌신입니다. 성도는 말이 열린 사람이 아니라 귀가 열린 사람입니다. 화목케하는 사람은 잘 듣는 사람입니다. 자기가 할 말만 골똘히 생각하는 사람이 많으면 다툼, 분리가 있지만, 그의 말을 들어보겠다는 예의를 갖춘 사람이 있는 곳에는 하나됨이 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 교인들은 베드로의 설명을 듣고나서 하나님 앞에 잠잠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마지막에 그들의 간증은 “하나님께서 이방인들에게도 생명을 얻는 회개를 주셨다”는 고백입니다. 이것이 가능했던 이유가 무엇입니까? 유대 할례자가 되었든 베드로가 되었든 그들 모두 하나님의 권위 앞에 굴복하는 모습이 있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잊지 마십시요. 교회가 의견은 갈라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하셨고, 하나님의 뜻이라고 하면 모두 다 아멘으로 무릎 꿇을 수 있을 때 공동체는 평안해지고 하나되는 능력있는 교회가 될 수 있습니다.
2. 확신이 있어야 설명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화를 내거나 조급해 하지 않고 자기가 겪었던 사실들을 크게 두 가지로 설명합니다. 첫 째는 5-10절까지의 내용인데 그것은 베드로가 본 환상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두 번째는 11-16절까지에 있는 고넬료의 집에 일어났던 성령의 역사와 세례 주는 일을 요약해서 보고를 했습니다. 지금 이 이야기는 행10장에도 똑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지금 누가는 행10장의 사건을 베드로의 입술을 통해서 다시 설명하고 있습니다. 초대 교회에 대해 할 말도 많을텐데 누가가 고넬료의 사건에 많은 부분을 할애하여 반복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베드로의 환상과 고넬료의 회심 사건은 이방 선교에 대한 하나님의 분명한 뜻을 제시해 주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도가 해야 할 일은 성령의 가르침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확신 있게 증거하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유대 할례자들의 오해를 풀어 주기 위해 사건의 전말을 자세히 설명해 준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그들이 이해해 달라고 애원조로 말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베드로는 성령이 고넬료의 집에 임한 확실한 증거를 제시하며 그 사건은 자신이 임의로 막을 수 없는 것이었음을 확신 있게 증거했습니다. “내가 누구이기에 하나님을 능히 막겠느냐”(17절)
누가가 고넬료의 사건을 거듭 반복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뜻을 알리고 확산시키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이 반복적 설명을 통해 이방 선교는 하나님의 뜻이라는 교회와 선교적 차원의 명확한 합의점을 얻게 된 것입니다. 사실 우리도 복음을 증거하든 어떤 오해를 풀어주든 이런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증거하는 사람이 확신이 없는데 어찌 그 사람의 말을 사실로 듣겠습니까? 불확실한 증거는 오해와 혼란을 증폭시킬 뿐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베드로와 같이 확신 가지고 문제를 풀어 가는 믿음의 종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교회 공동체 안에 의견이 갈리었을 때 수준이 낮을 때는 잘 듣고 배우는 자세가 필요하고 수준이 높을 때는 정말로 애정가지고 확신 가운데 설명해 주는 은혜가 임하기를 바랍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의 권위 앞에 다같이 무릎을 꿇을 줄 알 때 우리의 삶 속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이 임할 줄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