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민 오기 전 한국에서 교편 생활할 때 참 가깝게 지내는 선생님들이 참 많았습니다. 그런데 친하게 지나다보니까 종종 다투는 일도 많았습니다. 그러나 술 한 잔 마시고는 다 없었던 일같이 풀어지곤 하였습니다. 그런데 가만 보면 예수 믿는 사람들은 잘 싸우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한 번 싸우면 좀처럼 화해가 되거나 풀어지지 않는 것을 보게 됩니다.
왜 그럴까? 많은 사람을 만난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대체적으로 일반 사람들에 비해서 예수 믿는 사람들이 훨씬 더 신사적이고 양심적인 사람들이었던 것은 분명 맞습니다. 신자들은 본심으로 남을 해하려는 태도를 가진 사람이 거의 없었습니다. 그런데 왜 싸우고 난 다음에 화해가 쉽지 않을까?
예수 믿는 우리들이 상처를 더 깊게 받는 이유는 상대에 대해서 지나치게 높은 기대를 갖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인간이 추구할 수 없는 가능성 너머의 기대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세상 사람들은 서로에 대해서 지나친 기대가 없습니다. 왜요! 서로가 죄인임을 명확히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도들은 서로에 대한 기대가 예수님 수준입니다. 그래서 잘 하는 것을 보는 것이 아니라 못하는 것을 봅니다. 그래서 실망스러운 부분을 보면 그 잔상이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툭하면 우리 입에서 나오는 얘기가 무엇입니까? “예수 믿는 사람이 저럴 수가 있나!”라고 되새기며 용서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심지어 꽤 시간이 오래 지난 문제도 해결하지 못해서 두고두고 되새기곤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결코 성령의 역사하심이 아닙니다. 일종의 마귀의 농간일 때가 많습니다. 마귀는 그럴듯한 명분을 내세우며, 서로에 대해서 완벽을 기대하게 만듭니다. 그리고 완벽하지 못한 것을 되새기게 하며 상대의 결점은 크게 보이고, 크게 전하도록 부추깁니다. 마치 이렇게 하는 것이 투명성이고 이렇게 하는 것이 건강한 모습인양 위장합니다. 속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연약함을 보셨습니다. 그러나 성령의 능력으로 변화될 것을 기대하고 믿으셨습니다. 그래서 연약한 베드로에게 “네가 장차 게바(베드로,반석)가 되리라”(요1:42) 말씀하신 것입니다. 신앙의 성숙이란 무엇인가? 다른 사람에 대한 관대함이 생기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똑같은 연약한 죄인이라는 인식 하에 품어주고 이해하려는 마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최근에도 뜻하지 않은 오해와 갈등으로 좋은 관계의 단절이 혹 이루어 질까 걱정된 마음이 있어 이 칼럼을 씁니다. 길지 않는 인생, 교회 공동체 안에서 상대의 약점을 묵상하며 괴로워하는 인생이 아니라 상대의 장점 때문에 기뻐하고 정말 예수님 수준으로 바라보며 실망하는 일이 없었으면 합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로마서 8: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