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톤 한인 장로 교회 주일 설교 (2018년 9월 23일)
본문: 사도행전 15:22-35
제목: 예루살렘 교회의 탁월한 결정
설교자: 정창송 목사
성령과 우리는 이 요긴한 것들 외에는 아무 짐도 너희에게 지우지 아니하는 것이 옳은 줄 알았노니 우상의 제물과 피와 목매어 죽인 것과 음행을 멀리할지니라 이에 스스로 삼가면 잘되리라 평안함을 원하노라 하였더라(행15:28-29)
사도행전 강해 56번째 시간입니다. 오늘 본문은 예루살렘 교회가 최종 의결을 마치고 이를 안디옥 교회에 문서로 전달하는 장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안디옥 교회를 바로 세워 나가기 위한 예루살렘 교회와 사도들의 노력에 대해서 살펴봄으로서 사도행전에 나오는 아름다운 교회의 모습과 성도된 우리들이 붙들어야 할 참된 가치가 무엇인가? 살펴보고자 합니다.
1.복음의 참된 능력: 예루살렘 교회는 사안의 중요성을 감안하여 안디옥 교회의 문제에 대한 자신들의 의견을 전달하고자 사도들과 장로들과 온 교회가 자기들 중에서 몇 사람을 뽑아서 바울과 바나바와 함께 안디옥으로 보내기로 결정을 합니다.(22절) 예루살렘 교회는 안디옥 교회에 유다, 실라를 보내며 그들 편에 편지를 써서 보냅니다. 그냥 바울과 바나바에게 편지만 적어 보내도 되었을 텐데 굳이 사람을 보냅니다.
편지만 보내지 않고 사람을 함께 보낸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 그 이유는 자기들의 결정을 바울과 바나바를 통해서 전달하고자 한다면 안디옥 교회는 그것은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가 어려웠을 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 전달하는 내용이 정말로 예루살렘 교회의 결정인지 아니면 두 사도가 마치 예루살렘 교회의 결정인 것처럼 하고 자기들의 생각을 전달하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또 편지를 써 보낸다고 하여도 그 편지가 두 사도들이 자기들이 지어내서 쓴 글로 오해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두 사도와 함께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로 있던 유다와 실라를 함께 보내면서 이 사람들 편에 편지를 써서 보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만큼 예루살렘 교회는 안디옥 교회를 사랑하고 안디옥 교회가 바로 세워지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안디옥 교회가 혹시라도 오해하지 않도록 책임 있는 답변을 해 줌과 동시에 작은 것까지 관심을 기울여 줍니다. 그 모습이 사도행전에 나오는 참으로 아름다운 초대 교회의 모습인 것입니다. 이 일을 계기로 유대인과 이방인을 대표하는 두 교회는 더욱 가까워지게 되어 “형제”라는 말을 스스럼 없이 사용합니다.(23절) 이것은 두 교회가 주 안에서 하나됨을 보여 주며 동시에 이방인들로 구성된 안디옥 교회가 예루살렘 교회와 동격의 권위를 가진 교회임을 인정하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기독교와 복음의 능력입니다. 우리 민족은 참 배타적인 민족 중에 하나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배타적인 성향이 강한 이 땅에 외래종교라 할 수 있는 기독교가 뿌리를 내린 것은 기적 중의 기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기독교가 배타적인 성향이 강한 이 땅에 성공적으로 뿌리를 내린 이유는 복음의 능력 때문입니다. 그 복음의 능력이 어떤 혁명과 피흘림으로도 바뀌어 지지 않았던 일들을 이루어 냈습니다.
기독교가 한국땅에 들어오기 전 우리 땅에는 양반과 상놈이라고 하는 어떤 혁명과 피흘림으로도 바뀌어지지 않았던 계급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양반과 상놈이라고 하는 계급으로 운명 지어진 사회적 악습이 기독교가 들어오면서 자연스럽게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바뀌어 졌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신앙고백 때문이었습니다. 모두가 다 같은 하나님 아버지의 자녀라는 의식이 우리 기독교의 복음의 핵심 사상 중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그와 같은 복음의 능력 때문에 한 순간에 이 땅에서 양반과 상놈이라는 계급이 무너지게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우리 안에도 이 복음의 능력이 역사하게 되면 더 이상 말로만의 형제요 자매가 아닌 정말 함께 피를 나눈 형제 자매 이상으로 주님 안에서 한 가족이라고 하는 것을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우리의 삶을 통해서 실천해야 합니다.
2.믿으면 행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편지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먼저 본의 아니게 유대 출신인 어떤 사람들이 안디옥 교회에 내려와서 사견으로 교회를 혼란에 빠뜨린 일의 잘못을 인정하고 바로 잡으며 그 발생한 혼란에 대하여 명확하게 해명을 하였습니다.(24절) 그리고 바울과 바나바가 얼마나 사랑받는 일꾼들이며 주님을 위해 목숨을 걸 정도로 헌신적인 주의 종인지를 밝힘으로써 두 사람의 리더십을 공고히 해 주었습니다.(25-26절) 그리고 이 문제를 가볍게 여기지 않았기에 유다와 실라를 대표로 보내어 예루살렘 공회의 결정문을 전달하고 있음을 주지시켰습니다.(27절)
그리고 할례를 받지 않아도 됨을 명확히 하면서, 그러나 이방인의 풍습을 그대로 따르는 것은 문제가 됨을 분명히 말합니다. 그래서 정말 믿음으로 거듭난 주의 백성이라고 하면 이것은 마땅히 스스로 삼가며 지킬 것을 당부합니다. 그래서 비유대인 성도들에게 예수 공동체를 구성하는 사람들의 필수 조건을 4가지만 제시합니다. 그것은 “우상 숭배 금지”와 “피 목매어 죽인 것 곧 생명 존중”과 “음행 곧 성결을 중히 여기는 삶” 이것은 믿음으로 구원받은 자들이 지켜야 할 도덕적이며 종교적인 덕목으로 하나님 앞에서 반드시 지켜야 할 필수 덕목을 제시한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아주 중요한 표현이 나옵니다. 우리가 꼭 마음에 새겨야 할 표현입니다. 그것은 “성령과 우리는 이 요긴한 것들 외에는”(28절) 이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적어도 이것을 동의함에 있어서는 성령이 함께 하시고 하나님의 뜻이 함께 하시고 계시다는 것을 통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의 교회됨의 본질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또 한 가지 역시 대단히 중요한 말씀이 있습니다. 그것은 “스스로 삼가면 잘되리라 평안함을 원하노라”(29절) 그러니까 스스로 자발적으로 지키는 것이 되어야 한다 라는 것입니다. 천국 가기 위해서 저주 받지 않기 위해서 율법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믿음으로 감사함으로 자발적으로 지키는 것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정말 하나님을 사랑하고 신뢰하면 스스로 자발적으로 행하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잊지 마십시요. 기독교 윤리는 강요가 아니라 “마땅한 윤리”입니다. 한마디로 엄청난 사랑을 받았으니 당연히 사랑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믿음에 합당하게 살아가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기독교 윤리의 기초입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문제보다 중요한 것은 문제에 대한 반응입니다. 안디옥 교회의 큰 혼란과 문제가 오히려 교회가 더 아름답게 세워지는 축복이 되었습니다. 그것은 예루살렘 교회가 복음의 능력으로 변화되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또 우리가 정말 하나님을 사랑하고 믿는다면 그 믿음에 합당한 행위가 있어야 합니다. 주의 법을 스스로 자발적으로 지킬 줄 아는 성숙한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