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탄절 주일 말씀을 준비하면서 번뜩 내년 봄에 은퇴를 하게 되면 금년 성탄절이 마지막 성탄 설교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직 몇 달 시간이 있어서 매 주일 설교는 기회가 있지만, 성탄 예배라든가 다가올 송구영신 예배라든가 신년 감사 예배 같은 절기 예배는 이번이 마지막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예배 때마다 늘 설교에 대한 부담이 있었지만 그래서 은퇴하면 이 설교에 대한 부담에서 자유함을 얻어 참 홀가분할 것 같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막상 이번이 마지막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드니까… 시원 섭섭할 줄 알았는데…묘하게도 시원하다는 마음보다는 섭섭하고 아쉽다는 마음이 더 많이 들었습니다.
특별히 은퇴를 앞두고 예배에 대한 간절한 마음이 있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 아버지께 참되게 드리는 예배, 아버지께서 찾으시는 예배자들이 드리는 예배, 그런 성령과 진리로 인도함을 받는 예배에 대한 사모함이 있어서… 요즘 매일 은퇴 전에 그와 같은 예배를 맛보게 해달라고 그리고 그런 예배를 이후에도 계속 밀톤한인장로 교회의 흔적으로 남기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예배에 대한 사모함은 원함으로만 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인생에서 중요한 것은 선택과 결정입니다. 사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예배의 소중함과 중요성은 다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예배의 중요성을 아는 것만으로는 예배의 축복을 누릴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예배의 축복을 누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예배의 방해가 되는 요소를 찾아 분명한 선택과 결단을 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성경에 보면 믿는 듯 보이는 안믿는 모습의 대표적인 예가 나옵니다. 그 중의 하나가 “산당 제사”입니다. 남유다에는 그래도 다윗과 같은 수준은 아니지만 꽤 하나님을 잘 섬기었던 왕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공통된 약점과 아쉬움 중의 하나는 그들이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께 예배를 드린다 하면서 “산당 제사”를 버리지 못한 것입니다.
왜 산당 제사를 못 버리나? 그것은 “편하기 때문입니다” 멀리 성전까지 갈 것 없이 동네마다, 동산마다 “산당”지어서 예배하면 되었기 때문입니다. 다윗 못지않게 하나님을 잘 섬겼던 여호사밧 왕조차 “산당 제사”를 포기하지 못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편의성” 때문입니다. 편의성에 빠져 예배를 드리면 결국은 상황 윤리에 빠져 나중에는 신앙도 예배도 버리는 자리까지 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코로나19로 인한 비대면 예배가 참 위험합니다. 비대면 예배는 각자 있는 처소에서 예배를 드리다 보니까 참 편하고 시간도 절약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편함 속에는 독이 있습니다. 그 편함을 깨야 합니다. 성령충만은 하나님 충만입니다. 정말 내가 죽고 예수로 살아야 영과 진리로 드리는 넘쳐나는 응답과 하나님의 구원과 생명, 치유와 회복의 역사를 경험할 줄 믿습니다. 마지막 남은 목회가 그런 생명이 넘치는 하늘 능력이 임하는 예배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제 안에 예배와 말씀에 대한 아쉬움이 있어 참 감사했습니다.
| “여호사밧이 그의 아버지 아사의 모든 길로 행하며 돌이키지
아니하고 여호와 앞에서 정직히 행하였으나 산당은 폐하지
아니하였으므로 백성이 아직도 산당에서 제사를 드리며
분향하였더라” (왕상 22: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