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예상치 않은 일이 최근에 일어났습니다. 지난 가을 학기부터 워터루 대학 대학생 선교회(Agape Impact/CCC)가 약해지면서 “아! 캠퍼스 사역은 여기까지 인가 보다” 생각했는데 오히려 AI 학생들로 제한되었던 순모임이 원하는 학생은 누구나 성경 공부에 참여할 수 있는 길이 열려서 더 많은 학생들이 참여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멈추지 않고 구엘프 대학에도 복음이 증거되는 길이 열리더니 금주에는 정말 생각지도 못한 워터루 대학 대학원생들과 맥메스타 대학 대학원생들이 그것도 박사 코스를 공부하는 대학원생들이 순모임을 할 수 있는 길이 열렸습니다.
과연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연속되어지는 이 사역을 내가 감당할 수 있을까…. 욕심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3개 대학 8개 팀의 순모임을 매 팀 1시간 20분 정도의 이 사역을 감당할 수 있을까 가족들은 아빠 나이를 생각해야 한다고 걱정들을 합니다.
일단 기도하면서 하나님께서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실 것을 믿고 시작을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이것이 하나님이 주신 사명이라고 한다면 순종해야 한다고 생각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기도하면서 모든 능력, 모든 경험, 모든 노하우를 다 쏟아 부어서 사명을 이루어야 한다고 마음을 먹었습니다. 대부분 어려우면 포기를 합니다. 사명이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명자는 죽더라도 갑니다. 손해보더라도 갑니다. 왜냐하면 “어려운가 쉬운가”가 기준이 아니라 “이게 하나님의 뜻이냐 아니냐”를 묻기 때문입니다.
문제가 커 보이면 안됩니다. 문제에 눌리면 문제를 이길 수 없습니다. 문제가 작아 보일 때까지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와 비전으로 무장된 여호수아와 갈렙은 “저들은 우리 먹이다, 우리 밥이다”라고 외쳤습니다. 반면에 문제에 눌린 10명의 정탐꾼은 “우리는 메뚜기”라고 외쳤습니다. 문제는 문제 밖에서 오는 힘에 의해서 해결될 수 있습니다. 기도해야만 오는 자금이 있습니다. 기도해야만 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기도해야만 오는 환경이 있습니다. 기도해야만 오는 아이디어가 있습니다. 기도로 문제를 풀어가기로 마음 먹었습니다.
저는 부족하지만 쓰임받는 것이 축복이라고 생각합니다. 루터는 친구와 같이 걷다가 친구가 벼락에 맞아 죽는 경험을 했습니다. 나는 살고, 친구는 죽었다. 왜 하나님은 나를 살려 두셨을까? 루터는 사명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처럼 사명자는 자기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산다고 생각합니다. 내게 정말 사명이 있다면 굳이 충성하라고 말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충성하지 말라고 해도 충성합니다.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생명과 연결된 사명은 굳이 격려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사도행전 20:24)
이 사도 바울의 고백이 나의 고백이 되었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