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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의 전도에서 얻는 교훈

밀톤 한인 장로 교회 주일 설교 (2018년 7월 29)

본문: 사도행전 13:13-31

제목: 바울의 전도에서 얻는 교훈

설교자: 정창송 목사

바울과 및 동행하는 사람들이 바보에서 배 타고 밤빌리아에 있는 버가에 이르니 요한은 그들에게서 떠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고 그들은 버가에서 더 나아가 비시디아 안디옥에 이르러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앉으니라(13:13-14)

사도행전 강해 48번째 시간입니다. 오늘 본문은 구브로에서 시작된 전도 사역에 이어 비시디아 안디옥에서의 전도 사역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복음을 전하는 과정에서 겪는 여러 가지 변화를 통하여 하나님이 주시는 소중한 교훈들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1.두 가지 형태의 리더십: 오늘 본문 13절에서 우리는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바울과 동행하는 사람들이” 이렇게 본문 13절 이후부터는 항상 바울을 중심으로 선교가 진행이 됩니다. 이전에는 언제나 바나바와 사울로 소개되었는데, 13절 이후에서는 항상 바울과 바나바로 두 사람이 소개됩니다. 그러니까 지금 1차 선교 여행이 시작되면서부터 선교 사역의 주도권이 바나바에게서 바울로 이양 된 것입니다. 그래서 설교를 해도 바나바가 하는 법이 없습니다. 바울이 설교를 했고 선교 여행을 주도적으로 끌고 나가는 것도 바울입니다.

그러면 바나바가 신앙 인격이나 연륜이나 지위나 이렇게 모든 면에서 부족한 바울을 섬길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입니까? 사람이 착하고 인격이 훌륭해 서가 아닙니다. 또한 영적으로 부족함이 있어 서가 아닙니다. 바나바는 자신의 유익보다는 항상 하나님 나라의 유익에 사역의 기준을 두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 형태의 리더십이 교회 안에 있음을 보게 됩니다. 바울의 리더십과 바나바의 리더십입니다.

첫째 바울과 같은 리더십은 사역의 정면에서 지도자로서 복음 사역을 주도적으로 이끌고 가는 사람입니다. 또한 바나바와 같은 사역은 무대 뒤에서 도와 주는 사람입니다. 뒤에서 돕고 협력하고 내조해 주는 그런 사역입니다. 이 두 가지 형태의 리더십이 조화를 이루어야 합니다. 누가 높고 낮은 것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면 누가 바울이 되어야 하고, 누가 바나바의 사역을 감당해야 합니까? 그것은 은사입니다. 하나님이 각자에게 주신 은사에 따라서 사명을 감당할 때 하나님의 교회는 아름다워지고 든든히 서 가게 되는 것입니다. “다 사도이겠느냐 다 선지자이겠느냐 다 교사이겠느냐 다 능력을 행하는 자이겠느냐”(고전12:29)

2.준비되지 않은 전도자: 본문 13절을 다시 보시면 마가 요한이 선교 여행을 중도에 포기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는 사태가 발생합니다. 어떤 이유인지 알 수 없지만 나중에 2차 선교 여행에서 요한의 동행 문제가 바울과 바나바가 갈라지는 원인이 된 것으로 보아 바울은 마가 요한의 행동에 매우 실망한 것으로 보입니다. (행15:36-40) 그러면 왜! 마가 요한이 갑자기 선교를 포기하고 중도에 집으로 돌아갔는가 하는 것입니다. 분명한 이유는 성경에 나와 있지 않지만 마가가 시험에 든 것이 분명합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마가 요한은 준비되지 않은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준비되지 않은 사람이 기분에 따라 감정적으로 일을 결정한 것입니다. 그러다가 실제로 현실적인 심각한 문제에 부딪치니까, 너무 힘들고 어렵고 또 두려움도 생긴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붙들고 의지해야 할 것은 순간적인 은혜나 기분, 감정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마가가 왜 실패했습니까? 마가가 붙들고 의지할 만한, 자신의 삶의 기준이 될 만한, 그런 하나님의 말씀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바울과 바나바는 왜 중도하차 하지 않았습니까? 어려움이 없어서 일까요? 아니면 체면 때문이었을까요?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 듣고 분명한 사명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14절 이하에 보면 바울이 비시디아 안디옥의 회당에서 설교를 통해 복음을 증거하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굉장히 긴 내용이지만 정리하면 예수가 그리스도 곧 우리의 구주가 되신다는 메시지입니다.(23)

바울은 구약의 이스라엘 역사를 인용했습니다. 그것은 다윗 왕을 이야기하기 위해서입니다. 또 다윗 왕의 씨를 통해 메시야가 나타났는데, 그 메시야가 예수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말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본문 27절에 보면 바울이 이런 말을 합니다. “예루살렘에 사는 자들과 그들 관리들이 예수와 및 안식일마다 외우는 바 선지자들의 말을 알지 못하므로 예수를 정죄하여 선지자들의 말을 응하게 하였도다” 그런데 이 27절의 말씀을 좀 깊이 생각하면서 읽으면 잘 이해가 안되는 모순된 논리를 발견하게 됩니다.

분명히 안식일마다 예수와 선지자들이 하는 말에 대해서 외우는데 그 선지자들의 말을 알지 못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외우는 말씀인데, 그러면 누구보다도 잘 알아야 되는데 알지 못했다 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알지 못하므로”에 나오는 “안다”라는 헬라어 단어가 히브리어 “야다”라는 말에서 나온 단어인데, 이 단어의 의미는 지식적으로 안다 라는 의미가 아니라 “경험하다, 체험해서 안다”라는 의미로 쓰여졌습니다. 이런 뜻으로 27절을 다시한번 해석하면 “안식일마다 선지자들이 전하는 말을 잘 외우기는 외웠지만 한번도 그렇게 살아본 적이 없다. 그 말씀의 능력을 체험해 본 적이 없다.” 이런 뜻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을 수 밖에 없었다 라는 그런 의미입니다.

솔직히 말해서 교회에 오래 다니신 분들은 주일 본문만 딱 보아도 목사님이 무슨 말씀을 하실 것인가! 대충은 감을 잡으십니다. 그러나 그렇게 잘 알고 있는 말씀이지만 이 말씀이 내 삶 가운데 체험된 적이 있는가? 경험해 본 적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마가 요한이 왜! 선교 도중에 등을 돌리고 돌아 갔습니까? 이러한 놀라운 말씀에 대한 체험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만약 마가가 이 복음의 말씀이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이며 오직 우리가 붙들어야 될 생명줄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으면 결코 돌아가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 시간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삶 가운데 믿음으로 체험되어 지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교회 안에는 이 두 가지 리더십이 존재합니다. 또 존재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은사가 각각 다르다는 사실을 오늘 나눈 말씀에서 발견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우리 모두 예수 그리스도를 붙잡으시기를 축복합니다. 예수님만이 우리의 구주가 되시고 생명과 길 되심을 꼭 붙드시고 예수님을 말씀 가운데 늘 체험하시는 은혜로 세상을 이기시는 믿음의 종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