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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같이 보이는 잘못된 믿음

밀톤 한인 장로 교회 주일 설교 (2018년 10월 14일)

본문: 사도행전 16:1-5

제목: 믿음같이 보이는 잘못된 믿음

설교자: 정창송 목사

바울이 그를 데리고 떠나고자 할새 그 지역에 있는 유대인으로 말미암아 그를 데려다가 할례를 행하니 이는 그 사람들이 그의 아버지는 헬라인인 줄 다 앎이러라.이에 여러 교회가 믿음이 더 굳건해지고 수가 날마다 늘어가니라 (16:3,5)

사도행전 강해 58번째 시간입니다. 오늘 본문은 바울과 바나바의 결별 이후 바울의 2차 전도 여행의 첫 번째 사역지인 더베와 루스드라에서의 사역을 소개하고 있는데, 그 중심적인 내용은 디모데와의 동역과 디모데의 할례 사건입니다. 우리는 이 사건에서 보여준 바울의 행동을 통해서 우리가 상식적으로 생각하는 “믿음같이 보이는 믿음이 아닌 것들”에 대한 오해를 통해서 우리가 자칫 잘못하면 빠질 수 있는 믿음의 오해가 무엇인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1.하나님의 일에 합당한 동역자를 만나야 합니다: 오늘 본문 1-2절을 보면 바울이 루스드라에서 장차 자신에게는 믿음의 아들과 같은 존재가 되는 디모데를 만나는 장면이 나옵니다. 디모데는 바울의 1차 전도 여행 때에 외조모 및 어머니와 함께 복음을 받고 예수를 믿은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행14:6) 바울이 마가로 인해 바나바와 불화하고 난 후 실라를 택해 함께 전도 여행을 시작했는데 이 루스두라에서 디모데와 함께 사역을 시작합니다.

  그래서 성경에 보면 바울에게 있어서 진짜 동역자는 누구인가 하면 바로 이 디모데입니다. 바울은 이 디모데를 단순한 제자가 아닌 제자 이상의 친밀한 영적 아들로 여긴 듯 합니다. 그러니까 바울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인물은 디모데입니다. 바울이 13개 서신서를 썼는데, 이 13개 서신서 중에 두 개는 디모데를 위해 썼고 나머지 성경 중 무려 9개 서신서에서 디모데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디모데는 바울의 사역에 있어서 없어서는 안될 귀중한 사람인 것입니다. 이런 믿음의 아들을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붙여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메시지가 무엇입니까? 떠나간 사람에게 너무 연연해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새로운 사람을 붙여 주신다 라는 것입니다. 떠나간 바나바나 마가에게 연연하지 말고 하나님께서 붙여 주신 디모데하고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다 라는 것입니다. 떠나간 바나바와 마가가 나쁘다 라는 것이 아닙니다. 나중에 이들도 다 바울의 소중한 동역자가 다시 됩니다. 그러므로 지금 옆에 있는 사람이 귀중한 것입니다. 지금 같이 있는 사람과 한 팀을 이루고 동역할 줄 알아야 한다 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힘차게 나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일을 할 때 우리가 붙들어야 할 소중한 사역의 원리입니다.

  그러면 바울이 왜 디모데를 택하였을까요? 본문 2절을 보면 “디모데는 루스드라와 이고니온에 있는 형제들에게 칭찬 받는 자니” 그러니까 디모데는 그 지방의 성도들에게도 인간적으로나 신앙적으로 칭찬을 받았기에 바울은 자신의 적합한 동역자로 생각한 것입니다.(딤전3:7) 이처럼 디모데는 아직 연소하고 부모가 서로 종족이 다르다는 가정적 약점을 가지고 있었지만 사람들로부터 칭찬을 들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디모데와 같이 하나님 앞에 귀하게 쓰임 받는 인생이 되시기를 원하십니까? 칭찬받는 사람으로 사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칭찬받는 사람으로 내게 주어진 일들을 감당하고 있으면 하나님께서 때가 되면 영적인 바울을 보내셔서 디모데를 일으켜 세우는 놀라운 은혜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2. 믿음은 무조건 믿습니다하는 식의 신앙 자세가 아닙니다: 본문 3절에 보면 “바울이 그를 데리고 떠나고자 할새 그 지역에 있는 유대인으로 말미암아 그를 데려다가 할례를 행하니 이는 그 사람들이 그의 아버지는 헬라인인 줄 다 앎이러라” 이처럼 바울은 우리의 상상과는 반대로 할례를 주는 장면이 나옵니다. 우리는 바울의 이 모순된 행동을 통해서 참 당혹감을 느낍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바로 앞장인 행15장에서 예루살렘 공의회가 열렸는데 이 공의회의 주 의제가 예수 믿는 사람들의 할례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이 “요긴한 것 외에는 짐 지우지 말자”(행15:28) 하며 할례가 구원의 방편이 아님을 분명히 결의했습니다.

  그 결의의 주동자가 바울 아닙니까? 그런데 그 다음 16장에 넘어 가자 마자 곧장 디모데에게 할례를 베푸는 장면이 나옵니다. 일관성이 없어 보이고 바울의 모순된 행동 같이 보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중요한 원칙 하나를 생각해야 합니다. 사실 안디옥 교회에서 처음 할례가 문제가 되었던 이유는 할례를 구원과 연결시켰기 때문입니다. 할례를 받아야만 구원을 얻는다는 얘기였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 잘못된 율법주의에 선을 확실히 그어 놓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는 것이다 라고 주장을 하였습니다. 왜요! 이것은 신앙의 본질적인 문제였기 때문에 목숨을 걸고 싸워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지금 본문인 16장에 나오는 할례 사건은 복음 전파의 장애 문제입니다. 공연히 유대인 전도에 장애가 될 할례 문제는 그대로 둘 필요가 없다는 것이 바울의 생각입니다. 오히려 개인적으로 할례 받고 전도하는 일에 열심을 내야 된다라는 것입니다. 한국적인 상황에서는 금주 금연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잊지 마십시요. 믿음이라는 것은 가장 중요한 것은 지키고 복음의 장애가 되는 것에 대해서는 어떤 때는 양보할 수도 있고, 어떤 때는 자기의 특수한 권리라 할지라도 포기할 수 있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복음의 진리와 관계입니다. 사소한 일을 가지고 관계를 깨는 것은 절대로 믿음이 아닙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맺고 그 관계를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믿음의 종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 결과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교회에 큰 부흥이 일어납니다.(4-5절)

말씀을 마칩니다: 우리는 믿음이라고 하면 “할렐루야, 아멘”하고 부딪치는 것만 믿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사람을 얻고자 할 때 중심적인 기본 진리 이외에는 얼마든지 양보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믿음의 오해가 되는 것들을 점검하시고 올바른 믿음으로 재무장하는 믿음의 종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