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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만나고 싶지 않은 나를 만나주시는 주님이십니다

고난 주간을 맞이하면서 예수님의 사랑을 묵상했습니다. 예수님의 고난을 묵상하는 가운데 두 가지가 궁금했습니다. 하나는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놀라우신 사랑인데 그 사랑을 어떻게 성도들에게 피부에 닿게 전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예수님의 사랑은 어떤 사랑인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의 절정은 십자가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독생자까지 아낌없이 십자가에 내어 주신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그 놀라우신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내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것도 영원히 죽을 수 밖에 없는 죄인 중의 죄인이라는 사실을 인지할 때 비로서 우리는 죄사함의 은총을 깨달아서 하나님의 사랑을 느낄 수가 있는 것입니다.

마치 감옥 속에 있는 죄수 가운데 자유 사면의 은혜를 입는다면 누가 가장 자유 사면 곧 용서의 그 기쁨을 누릴 수 있겠습니까? 사형을 언도받은 사형수가 아니겠습니까?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나님의 그 놀라우신 사랑을 깨닫기 위해서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 얼마나 무서운 죄인인가를 깨달아 알아야 합니다. 우리 모두는 거룩하신 하나님, 죄없으신 하나님이 십자가에 박혀 죽으실 만큼 우리의 죄가 치명적이었다라는 사실을 명확히 깨달을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의 출발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라는 고백을 통해 출발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인된 우리들이 새로워지는 길은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뿐입니다. 사실 우리 자신도 만나고 싶지 않은 “나(자아, 에고)”가 있습니다. 우리 자신도 내 안에 있는 “나의 죄, 거짓, 음란, 탐심, 탐욕, 외식, 교만”을 회피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런 우리를 만나 주십니다. 심지어 “자기 것으로 품어 주십니다” 정말 어떤 때는 “나도 만나고 싶지 않은 나를 만나 주십니다” “나도 품지 못하는 나를 품어 주십니다.”

이 때 우리의 에고의 껍질에 금이 가고 예수의 사랑과 생명이 그 틈 사이로 들어오는 것입니다. 이 십자가의 사랑 없이는 결코 새로워질 수 없습니다. 이 십자가의 은혜가 없이는 결코 우리의 자아는 깨어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계속 십자가의 예수님만 증거해야 합니다. 그래야 가짜가 깨지고 진짜가 생명을 만나는 것입니다. 진짜 생명이신 예수의 사랑을 만나면 완전히 변화됩니다.

십자가의 주님을 만나십시요. 그러면 변화된 자신을 발견하게 것입니다. 이게 복음이 하는 일입니다. 복음은 죄의 심각성에서 시작됩니다. 지옥의 운명을 깨달은 사람이 구원의 감격을 누립니다. 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과 생명의 복음은 죄로부터 시작합니다.

 예수님은 자기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실 때 제자들은 스승 되시는 예수님을 모두 부인하고 버렸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미리 용서하시기 위해 그들의 발을 씻어 주셨습니다.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빌어야 할 제자들에게 오히려 예수님이 무릎을 꿇고 그들의 죄를 용서해 주셨습니다. 이게 우리를 향하신 주님의 사랑입니다. 그런 까닭에 고난 주간은 예수님의 고난에 감사하는 주간이 되어야 합니다. 고난 주간에 우리를 끝까지 사랑하시는 예수님의 사랑 속에 사시길 바랍니다.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가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요1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