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톤 한인 장로 교회 주일 설교 (2018년 4월 29)
본문: 사도행전 9:26-31
제목: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가고
설교자: 정창송 목사
사울이 예루살렘에 가서 제자들을 사귀고자 하나 다 두려워하여 그가 제자됨을 믿지 아니하니….그리하여 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 가고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수가 더 많아지니라 (행9:26,31)
사도행전 강해 37번째 시간입니다. 오늘 본문은 사울이 다메섹에서의 회심한 이후 처음으로 사모하던 예루살렘 교회를 방문했을 때에 겪었던 어려움과 이 일 후에 일어난 교회의 놀라운 역사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 든든히 서가는 교회가 되기 위해서 우리가 꼭 붙들어야 될 것이 무엇인가 살펴 보고자 합니다1.
1. 부흥의 요인: 오늘 본문을 보면 회심한 사울이 다메섹에 있을 수 없어서 예루살렘으로 올라 갑니다. 올라 갔더니 자신의 생각과는 전혀 다른 문제가 생겼습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이 은혜스럽게 해결되어 마지막 31절을 보면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가고 큰 부흥이 일어남을 보게 됩니다. “그 부흥의 요인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31절 다시 보면 “그리하여”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그 의미는 크게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사울이 주 예수의 이름으로 복음을 담대히 증거함으로 인해 유대인들과 사울 간의 적대 관계가 사울의 피신으로 인해 해소되었습니다 (29-30절). 그런데 초대 교회의 근본 성장 원인이 사울의 복음 증거에 있었지만 이 사울이 사도 바울이라고 하는 위대한 사도가 될 수 있었던 것은 특별한 하나님의 은혜가 이었음을 보게 됩니다. 사실 사울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당시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과 교제도 할 수 없었으며 그저 이름없는 무명의 전도자로서 기독교의 한 변방에서 사역하다가 기독교 역사에 아무 이름도 남기지 못하고 죽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사울이 이처럼 위대한 사도가 될 수 있었던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는 바나바 때문입니다. 사울이 다메섹에서 회심하고 나서 유대교에 등을 돌림으로 헬라파 유대인들에게 엄청 핍박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에 돌아오니까 또 하나의 고난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예루살렘 교회와 사도들이 사울을 받아 주려고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본문 26절을 보면 사울을 만나는 예루살렘 성도들의 얼굴 표정이 쉽게 상상이 갑니다. 회심한 사울에게 손은 내밀지만 속으로는 굉장히 불안합니다. 그리고 지금 사울이 예루살렘에 올라간 것은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난 후에 곧바로 올라간 것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는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다른 성경에는 사울이 아라비아 광야에 가서 3년 동안 지내다가 간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갈1: 17-18).
그러니까 이미 회심한지 3년의 세월이 흘렀던 것입니다. 그러면 사울을 받아 들일 수 있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본문을 보면 사도들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다시 26절을 보시면 “…다 두려워하여 그의 제자됨을 믿지 아니하니” 이걸 통해 우리는 바울이 과거에 얼마나 교회와 성도들을 핍박했는지 그 핍박의 강도를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한마디로 사울 그러면 치를 떨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울이 교인들로부터 철저히 배척 당하고 있었습니다.
이 때 오늘 본문 27절에 보면 모든 사람들이 다 사울을 인정하지 않고 의심할 때 이 둘 사이를 하나 되게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가 바로 바나바입니다. 바나바만 유일하게 사울을 믿어 줍니다. 사실 바나바가 없었다면 사울 곧 사도 바울이 존재했을까 한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도 이 땅을 살아가면서 사람과의 관계에서 이렇게 오해가 생기고 또 주고 받는 상처로 인해 갈등이 생길 수 있습니다. 이럴 때 우리에게 필요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가 누구인가 하면 바로 바나바입니다. 만약에 바나바가 이 둘 사이를 하나로 만들어 주는 역할을 하지 않았다고 하면 어쩌면 사울은 초야에 묻혀 지내다가 끝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이 바나바가 사도 바울을 세계 선교의 주역으로 세워주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 큰 부흥을 경험하고 싶으십니까? 그러면 하나되면 큰 부흥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바나바의 사역이 중요한 것입니다.
2. 바나바의 신앙: 그러면 바나바가 이런 하나됨의 역사를 이룰 수 있었던 근본이 어디에 있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바나바가 이렇게 한 것은 단순히 사람이 착해서 성격이 좋아서가 아니라 그가 정말 성령의 사람이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바나바의 본래의 이름은 요셉입니다. 그런데 바나바라 불리우게 된 것은 이 바나바가 은혜 받고 나서 언제나 사람을 위로하고 세워주고 격려하고 하는 역할을 탁월하게 잘 하는 것을 보고 사도들이 바나바 곧 “위로의 아들”이라는 이름을 붙여준 것입니다 (행4:36).
여러분! 잊지 마십시요. 하나님을 사랑하고 성령 충만한 사람의 삶의 특징은 언제나 사람들을 위로하며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이것을 우리에게 분명히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 가고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수가 더 많아지니라”(31절).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가 있을 때 교회가 평안하고 든든히 서 가며 수가 넘쳐 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은혜 받은 사람들을 보십시요. 입만 열면 남에게 상처를 주고 남을 욕하던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로 변화되면 주님의 사람으로 다른 사람을 위로하고 남을 세워주며 격려하면서 살아갑니다. 이것이 은혜 받고 성령 받은 자에게서 나타나는 변화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보혜사 성령님은 위로의 영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영이 임하면 위로자의 삶을 삶으로 하나됨의 역사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또 한 가지 바나바에게는 통찰력이 있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못 보았으나 바나바는 보았습니다. 다른 사람은 의심했습니다. 그러나 바나바는 사울의 회심과 주께서 그에게 말씀하신 일과 그가 다메섹에서 어떻게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했는가를 확신함으로 사울을 마음을 다해 변호했던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복음의 능력과 십자가를 통한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없이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27절). 그래서 바나바는 사울의 모든 과거를 용서하고 수용했습니다. 그리고 사울의 현재의 변화된 모습만 바라보았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마음으로 살아가고 계십니까? 우리 모두 예수님의 십자가의 은혜로 용서함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런 우리가 모여서 교회가 되었습니다. 그렇기에 우리 모두는 주님처럼, 바나바처럼 용서하고 품을 수 있어야 합니다. 잊지 마십시요. 초대 교회가 이렇게 부흥할 수 있었던 것은 사울의 아픈 과거, 핍박자였던 사울을 품고 수용해 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십자가의 용서와 사랑으로 하나됨을 이루어 갈 때 큰 부흥의 역사가 일어날 줄 믿습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우리 교회가 오늘 본문의 예루살렘 교회와 그 지역 교회처럼 평안하여 든든히 서가고 그 수가 더 많아지는 놀라운 부흥하는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사울처럼 열심히 복음을 증거해야 합니다. 또한 바나바처럼 십자가의 용서와 사랑으로 품어주고 세워줌으로 하나됨을 이루어 갈 때 사람들은 교회로 몰려오게 되어 있슴을 믿습니다. 이것이 교회 성장의 비결입니다. 이것이 건강한 교회의 증거입니다.